며칠째 내리던 겨울비가 그쳤다.
며칠째 내리던 비가 그쳐 마당을 나가보니 지난해 말 구근을 구해 화단에 묻어 두었던 튜울립 새순이 빼곡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마당의 화초들도 가지마다 움이 트고, 매화나무는 일찌감치 맺었던 붉고 하얀 꽃을 떨구며 찬바람을 견뎌내고 있다. 얼어붙은 땅속 곳곳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생명들의 옹알이가 시작되는 3월. 오랜만에 괭이를 들고 나가 겨울비에 촉촉이 젖은 텃밭을 뒤섞고, 서둘러 묵혀둔 퇴비를 넣어 준다. 꽃샘 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지만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새봄 새로운 생명들이 애타게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는 법이다. 생전 처음 겨울을 보낸 어린 길고양이의 졸린 눈 속에도 첫 봄을 맞는 설레임이 가득하다.
올겨울이 가기 전 하얀 눈이 몹시 그리워 며칠 집을 비워 두고 중부지방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해마다 폭설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따뜻한 남녘이 그리울 테지만, 겨울이 되면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외딴 산골의 설경에 묻히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듯 떠나는 겨울이 아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과 떨어져 자연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사람들과 부대끼며 함께 손잡고 나아가고 싶은 사람도 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에 평안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적막한 시골의 밤하늘에 묻히고 싶은 사람도 있다. 복잡한 도시에서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삶이 있다면, 거친 들에 생명의 씨를 뿌리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세상사이다.
어떤 삶에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삶을 대신하지도 관여할 수도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그대로 완벽하고 평등할 뿐이다. 들판에 이름모를 다양한 꽃이 피고 지듯 우리네 삶도 그럴 것이다. 풀꽃 한송이 마다 저마다의 우주가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여전히 너와 나를 분별하고, 비교하며, 욕망한다. 자기만의 속 좁은 가치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려 한다. 이제 봄이 오면 얼어붙은 마음들이 조금은 녹아내리길 바라본다.
겨울을 보내며 한 번도 입지 않은 겨울옷들이 옷장에 가득하다. 입지도 않을 옷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무엇하나 제대로 버릴 줄도 모르는 유약한 습성 탓일까. 옛정에 연연하고, 추억에 심취하는, 미련 많은 마음의 감옥. 오랜 기간 간수도 없는 그 감옥에 스스로 안주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단촐한 시골집으로 귀촌하면서 묵은 짐들을 정리한다고 하였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한 짐들이 곳곳에 쌓여 있다. 비우고 놓아버려야 하는데도 여전히 움켜쥐고 있다. 아름다운 매화가 떨어져야 매실이 자란다. 계절이 바뀌면 철새들은 새로운 먹이를 찾아 먼 길을 떠나야 한다. 찬 겨울을 보낸 빈들만이 온갖 색깔로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들로 무성한 봄을 맞을 수 있다. 묵은 때를 벗고 다시 텅 빈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보고 싶은 계절이다. /선돌 최헌 (시티팜뉴스 발행인)
초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마음과 머릿속에 때가 많이 끼어서 인지 제대로 안 보이는데, 선돌님의 묘사는 정말 청명한 자연의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마음속에 전해집니다. 무위자연하시는 선돌님에게만 보이는 것들...
겨울이 있었기에 봄이 더욱 그립고 반가운가 봅니다. 누군가 치우지 않았지만 새순과 새잎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자연의 순리가 참 경이로움을 봄을 통해 배웁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오는 봄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