뺐던 진통제 다시 찾아 먹고도
내가 했던 말에 더 도지는 통증
처방받은 약은 사흘치
아침 점심 저녁 식후다
알약은 세 알
분홍색 진통제와 붉고 노란 항생제
그리고 초록색 위염 치료제다
풀 베다가 낫에 찍혀
이삼일 심하던 손가락 열 바늘 꿰맨 통증이
약 복용 하루이틀 지나자 살 만하다
살 만하니 진통제 알약은 골라낸다
위장에 주는 부담이 아무래도 있지 싶고
더는 복용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다
웬걸, 점심 약 그렇게 먹고 저녁이 되기도 전에
통증이 바늘이다
손가락을 쑤시고 손등을 쑤신다
통증은 끝나서 끝난 게 아니라
약의 힘으로 끝난 것처럼 보였던 것
약도 못 쓰는 통증은 또 얼마나 많은가
끝난 것도 아니고
끝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닌 통증
다쳐서도 흉터는 남지만
다치지 않고서도 백 바늘 천 바늘 꿰맨 흉터
고작 열 바늘이지만
남 일이 아닌 내 일이 되면서
예사로 들었던 아프단 말
아픈 사람에게 예사로 했던
다른 건 대신할 수 있어도
아픈 건 대신할 수 없단 말
뺐던 알약을 다시 찾아 먹고도
내가 했던 말에 더 도지는 통증
- 동길산 시 ‘통증’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왜 그때 관두지 못했나. 낫 대신 톱을 쓸걸. 병원에라도 빨리 갈걸. 생각이 생각을 문다. 하나같이 나에 대한 자책이다. 욕심을 부린 데 대한 자책이고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이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고 자책 역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딱 1분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는 세 시간 남짓. 몸은 지칠 대로 지쳤다. 잔대 뿌리만 쪼아서 베어내면 일을 마무리할 작정이었다. 1분 걸릴 일도 아니었다. 무딘 낫이긴 했지만 마지막 한 방이면 끝날 일이었다. 바로 옆에 톱이 있었지만 오래 써 무딘 낫으로도 충분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마지막 힘을 모아서 내려쳤다.
자충수였다. 힘을 쥐어짜 내리친 낫은 대뿌리를 베는 대신 대나무 쥔 왼손 손가락을 찍었다. 통증이 먼저 왔다. 통증은 제방이 터진 듯했다. 코팅 실장갑을 벗자 가운데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나왔다. 오른손으로 한참 눌려도 지혈이 되지 않았다. 마루를 후다닥 지나 안방 약통을 뒤졌다. 대일밴드 두세 장을 감고서 반창고로 친친 동여맸다.
어느 정도 지혈이 되자 안심했다. 이러다 아물겠지, 이러다 낫겠지.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너무 여유를 부렸다. 그때라도 병원에 갔어야 했다. 저녁이 되자 중지 끝마디가 새카맣게 변색했다. 만져도 감각이 없었다. 잠시 잊었던 통증은 밤이 되자 엄습했다. 몸을 움직이면 좀 나았다. 앉았다 눕기를 반복하다가 날이 샜다.
날이 밝자 한결 나았다. 어제 다치기 전에 쓰다 만 원고를 마무리했고 마루며 안방 핏자국을 지웠다. 한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오산이었다. 자만일 수도 있겠다. 다시 어두워졌고 밤이 왔다. 어제보다 더한 통증이 왔다. 반창고 틈으로 피가 찔끔찔끔 샜다. 손가락 끝마디는 어제보다 더 새카매졌다. 병원에 가나 마나. 파상풍을 검색했다. 가나 마나.
용단을 내렸다. 딴에는 용단이었다. 돈 천 원도 생각하고 생각해서 써야 하는 산골 살림에 택시를 불렀다. 그 와중에 꾀를 냈다. 그래, 가자. 이왕 갈 거면 할증요금이 붙지 않는 12시 이전에 가자.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제때 오지 않았다. 대신 전화가 왔다. 안개 탓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기어간다고. 그럴 만도 했다. 장마철 눅눅한 밤안개였고 컴컴한 산길이었다. 손목시계는 12시에 까닥까닥했다.
동길산
시인.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 등의 시집과 <어렴풋, 당신> 등의 산문집을 냈다. 1992년 경남 고성 대가면 산골로 귀촌해 처음 10년은 한 달 내내, 그다음 10년은 한 달의 절반, 지금은 한 달에 열흘을 산골에서 지낸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