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점도 버리고
스스로 여백이 되는 새
새를 새로 보이게 하는 건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여백
새가 점점 멀어져
맨눈으로 식별되는 거리를 벗어나도
바탕이 여백이라서 저게 새란 걸 안다
갖출 것 갖춘 숲을 박차고서
나뭇가지 하나 없는 여백으로 깃드는 새
햇빛뿐이거나 바람뿐이거나 마음뿐인 거기서
뜨겁거나 떨리거나 외롭거나 한 거기서
점점 점이 되어가는 새
새도 아는 것이다
새를 새로 보이게 하는 건
갖출 것 갖춘 숲이 아니라
아무것도 들이지 않은 여백
여백이 새를 점점 깊숙이 안으면서
큰 점이 되었다가 작은 점이 되었다가
마침내 점이란 것마저 버리고
스스로 여백이 되는 새
- 동길산 시 ‘여백’
고성 산골의 겨울 하늘. 맑은 하늘은 청자고 흐린 하늘은 백자다. 곰보 같고 잡티 같은 점 군데군데 박힌.
산골의 겨울 하늘은 도자다. 맑은 하늘은 청자고 흐린 하늘은 백자다. 공기가 깨끗하니 맑든 흐리든 양팔 벌려서 안고 싶은 하늘이다. 박물관 같은 데서 어떤 청자는 어떤 백자는 꼭 껴안고 싶듯. 청자의 기품이 백자의 기품이 실린 산골의 겨울 하늘.
아뿔싸. 그런 하늘에도 흠은 있다. 대기가 잡티투성이라면 오히려 띄지 않을 흠이 순정한 하늘을 배경으로 이리도 날아오르고 저리도 날아오른다. 가까이 있다가 멀어지기도 하며 멀리 있다가 가까워지기도 하며 겨울 하늘에 점을 콕콕콕 박는다.
콕콕콕 박힌 점, 곰보. 청자도 백자도 그렇다. 곰보 없는 청자 없고 곰보 없는 백자 없다. 궁극에 다다르기 직전 궁극을 일그러뜨린 청자의 곰보, 백자의 곰보. 그래서 곰보 하나하나 도자기 장인의 탄식이 담겼다. 깰까 말까, 장인의 고뇌가 담겼다.
탄식과 고뇌. 청자를 청자이게 하고 백자를 백자이게 한 건 그 탄식, 그 고뇌였다. 탄식의 선, 고뇌의 선을 긋고서 대개의 도자는 처음부터 선 저쪽이나 선 이쪽에 둔 반면 선에 달랑달랑 걸린 아주 일부의 도자. 그게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는 청자고 백자다.
하늘이라고 다르지 않다. 여름 하늘 다르고 겨울 하늘 다르며 도회 하늘 다르고 시골 하늘 다르다. 시골 하늘이라고 다 같지 않다. 읍 소재지 하늘과 하루에 버스 세 번 다니는 산골의 하늘이 어찌 같을까. 그런 하늘도 곰보 같고 잡티 같은 점은 어쩌지 못한다.
마당에 평상이 있을 때는 곧잘 대자로 누웠다. 여름은 모기가 극성을 부리니 주로 겨울에 그랬다. 따스한 날이면 거기 누워서 하늘 삼매경에 빠져들곤 했다. 저 멀리 점점 멀어지고 점점 작아지는 점을 보며 잠에 빠져들곤 했다. 한기는 들었지만 탄식도 없고 고뇌도 없는 잠이었다.
동길산
시인.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 등의 시집과 <어렴풋, 당신> 등의 산문집을 냈다. 1992년 경남 고성 대가면 산골로 귀촌해 처음 10년은 한 달 내내, 그다음 10년은 한 달의 절반, 지금은 한 달에 열흘을 산골에서 지낸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