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멋진 날

칼럼ㆍ기획

10월의 어느 멋진 날

지키지 못한 계율이 잔가지로 무성하다.

시티팜뉴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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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날 아침, 무수한 죄들이 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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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가을에는 단감을 맛보기가 쉽지 않았다. 마당에 심어진 감나무들은 잎만 무성한 채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했다. 채 익지 않은 어린 감들은 여름 비바람에 일찌감치 시퍼렇게 맥없이 떨어졌다. 해거리를 하는 것일까. 올봄 새로 난 가지들은 하늘로 치솟기만 할 뿐이고, 묵은 가지들은 노란 꽃잎만 떨군 채 검푸른 잎사귀만 무성하다. 

 

 가을바람에 어른 손바닥만한 감잎들이 마당에 어지러이 날려 햇살 좋은 시월 아침 톱과 가위를 들고 가지치기에 나섰다. 언뜻 보아도 쓸모없는 곁가지부터 전지가위로 잘라낸다. 넝쿨 사이로 집을 짓고 살던 거미가 서툰 가위질에 희생됐다. 시골살이를 하다보니 텃밭에서 살아가는 이름모를 벌레들과 개미들 부터 두더쥐까지 살생이 일상이 되고 만다.

 

 마른 가지에 새순을 틔우고 햇빛을 먹으며 자라난 새 가지들을 자르는 일은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철부지처럼 바람길을 막으며 안으로 엇자란 가지, 분수도 모르고 하늘로 고개를 쳐든 웃가지, 제 혼자 잘난체 하며 튀어나온 가지들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잔가지들을 대충 정리하고 돌아서려는데 멀찍이 지켜보던 아내가 그렇게 할거면 안하느니 못하다며 쏘아붙인다. 다시 전지가위를 들려는데 저만치 버려둔 톱이 눈에 들어온다. 아내의 질책이 나의 애꿎은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어느 놈부터 처치해드리까요망나니 마냥 큰소리를 치자 감나무가 크게 자라지 못하도록 굵은 가지 몇 개를 없애라고 한다. 나무가 너무 크면 그늘만 키우고, 감을 따기도 힘들다는 이해하기 힘든 논리다. 무성한 가지는 풍성함을 선사하고, 높이 열린 감은 안 따먹어도 될텐데도 말이다. 무엇보다 나무도 맘껏 자라고 싶어할 것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러나 올해 제대로 결실을 맺지 못한 불쌍한 감나무는 인간사를 감당할 수 없다. 두터운 껍질만큼 고집스런 묵은 가지들을 골라 시퍼런 톱질을 했다. 불임의 죄가 날카로운 비명을 덮고, 굵은 나이테를 따라 무수한 세월들이 무너져 내렸다. 나이 든 등줄기를 따라 식은 땀이 흘렀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살아오면서 지은 무수한 죄들이 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 있다.

 

 지친 톱날을 거두고 장갑을 벗으려는데 담장 넘어 지켜보던 늙은 농부가 할려면 제대로 해야지요라며 달려든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감나무 한가운데 가장 굵고 우뚝한, 그래서 가장 멋지고 오래된 가지를 싹둑 잘라내 버린다. ‘원래 감나무 가지치기는 인정사정없이 해야한다는 교훈을 던지며 유유히 사라지는 농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감사의 인사로 나의 무기력을 달래야 했다.

 

 그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해진 나무에 만족한 미소를 보이던 아내가 차려준 점심상의 막걸리가 나의 허전함을 달랬다. 낮술로 불거래진 얼굴을 달랠 겸 산책을 하다 팔관회가 1021일부터 사흘간 열린다는 어느 사찰에 걸린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팔관회(八關會)살생과 도둑질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며, 헛된 말 하지 말며, 음주하지 말라"라는 불교의 오대계(五大戒), "사치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며, 때 아닌 때에 먹지 않는다"라는 세 가지를 덧붙인 여덟 가지 계율을 재가신도(在家信徒)들로 하여금 하루 낮·하루 밤 동안 지키게 하는 의식으로, 금욕(禁慾)과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 행사라고 한다.


 이제 늦은 밤 허전함으로 바라본 감나무 위로 예전에 보이지 않던 별들이 보인다. 감나무 가지와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 않던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나를 반긴다. 담장너머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잘려 나간 가지사이로 멋진 10월의 어느 날이 찾아왔다.

 

 내년에도 팔관회가 열릴 때쯤이면 지키지 못한 계율이 감나무 가지처럼 무성할 것이다. 그때 쯤이면 난 가지치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선돌 최헌(시티팜뉴스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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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수선화
한편의 가을동화를 본 느낌
susu
가지 치기의 단호함 없이 우유부단하기만한 내 자신을 보면서 드는 내 무기력은 무엇으로 달래야하나... 가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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