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무거워지는 꽃의 자리,
그리고 사람의 자리
* 동길산 시인의 집 마당에서 영그는 매실. 방울방울 맺힌 빗방울은 여름이 왔음을 실감한다.
매실 익는 여름철에 오는 비를 매우(梅雨), 여름 장마를 매림(梅霖)이라고 한다. <사진=동길산 시인>
꽃이 무거워서
꽃을 떨구었는데
꽃보다 무거워지는
꽃의 자리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떨어져 나가
떨어지기 전보다 무거워지는
사람의 자리
- 동길산 시 ‘매실’
매실이 영근다. 파릇파릇하고 탱글탱글한 게 보기가 좋다. 비 그치고 물기 마르면 따도 되겠다. 성질 급해서 제풀에 떨어져 나간 몇도 보인다. 매화를 사군자라 받들지만 제풀에 떨어져 나간 매실을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성질 급한 군자가 어디 있던가.
매화는 군자보다 예술인에 가깝다. 혈액형으로 따지자면 대체로 이지적인 A형보다 대체로 감성적인 B형이다. 감성적이라서 뒤틀리기도 잘한다. 매화는 꽃도 좋고 매실도 좋지만 아무래도 일품은 뒤틀린 가지다. 꽃도 금방이고 매실도 금방이지만 이리 뒤틀리고 저리 뒤틀린 가지는 반영구적이다.
뒤틀려 본 사람은 안다. 기쁨은 잠시고 슬픔은 오래란 걸. 슬픔이 북받치는 순간은 앞이 보이지 않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매사가 구불구불하고 뒤틀린다. 길도 그렇고 길을 가는 사람도 그렇다. 경남 고성 대가면 산골로 이사한 게 삼십 대. 내 생애 가장 구불구불하고 뒤틀린 때가 30년 전 그때였다. 그 무렵 내 눈에 들어온 게 뒤틀린 매화였다.
그렇긴 해도 나는 참 못됐다. 뒤틀린 가지가 일품이라니. 지나치게 내 중심적이다. 매화 입장에선 고통을 감내하고서 다다른 뒤틀림이지 않은가. 그 좋은 꽃 다 떨구는 고통이 오죽했을까. 꽃이 좋았기에 더 뒤틀렸는지도 모른다. 뒤틀리지 않은 데가 없어서 손 내밀기도 조심스럽다. 깊은 고통을 어쭙잖은 말로 달래려는 것만큼 가벼운 게 있을까.
사람에 왕이 있듯이 나무에도 왕이 있다. 매화가 그런 부류의 나무다. 미사여구가 아니다.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도 아니다. 실제로 그렇다. 나무(木)의 왕(王)을 한자로 쓰면 왕(枉). 굽다, 휘다, 뒤틀리다는 뜻이다. 대개의 나무는 오래돼야 굽고 휘고 뒤틀리지만 성년이 되기도 전에 굽고 휘고 뒤틀려서 평생을 가는 매화야말로 나무의 왕이다.
비가 오래 간다. 어제 오전부터 간간이 내리더니 만 하루를 넘긴다. 매실 익는 이즈음 내리는 비를 매우(梅雨)라고 한다. 곧 들이닥칠 여름 장마는 매림(梅霖). 림(霖)이 장마란 뜻이다. 림은 그림이 그려지는 한자다. 비가 숲속 나무처럼 촘촘하게 퍼붓는 장면을 순간 포착했다. 매우니 매림이니 이즈음 여름비는 매화 향기로 향긋하다. 매화가 향긋하니 비도 향긋하다.
* 동길산 시인의 산골집 마당에서 지난겨울 꽃을 피우는 매화. 매화 너머로 저수지가 보인다.
동길산 시인은 1992년 6월 여기 귀촌해 현재 서른 해 넘게 지낸다. <사진=동길산 시인>
동길산
시인. 부산에서 태어나 초중고와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다. 1989년 무크지 <지평>으로 등단했으며 <꽃이 지면 꽃만 슬프랴> 등의 시집과 <어렴풋, 당신> 등의 산문집을 냈다. 1992년 경남 고성 대가면 산골로 귀촌해 처음 10년은 한 달 내내, 그다음 10년은 한 달의 절반, 지금은 한 달에 열흘을 산골에서 지낸다. 2020년 김민부문학상을 받았다.